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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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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계 미국인은 프랑스, 프랑스령 캐나다, 그리고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미국 독립 이전부터 미국에 정착했으며, 특히 중서부, 루이지애나, 뉴잉글랜드 지역에 많이 거주했다. 19세기에는 퀘벡에서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섬유 산업에 종사했다. 프랑스계 미국인은 언어,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측면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으며,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5.3%가 프랑스계 또는 프랑스계 캐나다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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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계 미국인
개요
프랑스계 미국인 및 캐나다인의 비율
프랑스계 미국인과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비율 (주 및 지방별). 이 지도는 아카디아인/케이준, 크리올, 프랑스계 캐나다인, 아이티인, 메티스 또는 퀘벡인으로만 식별되는 사람들의 데이터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총 인구 (프랑스계 캐나다인 포함)25,853,902명 (7.4%) (단독 또는 복수 응답)
총 인구 (프랑스계 캐나다인 제외)22,964,646명 (6.9%) (단독 또는 복수 응답)
프랑스계 또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단독 응답)2,384,822명 (1.3%)
프랑스계 (단독 응답)1,603,732명 (1.5%)
주요 거주 지역뉴잉글랜드루이지애나주 (주로),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위스콘신주, 미시간주, 미드-애틀랜틱
사용 언어프랑스어, 루이지애나 크리올, 영어, 프랑글레
종교주로 기독교 (가톨릭 다수, 개신교 소수)
관련 민족프랑스인, 프랑스계 캐나다인, 바스크계 미국인, 벨기에계 미국인 (위스콘신 왈롱인), 브르타뉴계 미국인, 카탈루냐계 미국인, 코르시카계 미국인
관련 이미지

2. 역사

프랑스계 미국인의 역사는 미국 독립 전쟁 이전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초기에는 미국 중서부, 루이지애나주, 뉴잉글랜드 북부와 같은 지역에 정착했으며, 이들이 세운 도시들은 프랑스식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데모인, 세인트루이스, 루이빌, 디트로이트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10]

프랑스 왕국 출신 정착민들과 위그노를 포함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시)에 정착하기도 했다.[11][12]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퐁텐블로 칙령 이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위그노들이 뉴네덜란드와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18][12]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이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했고, 이후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미국 독립 전쟁 무렵, 위그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혼인하여 장로교 공동체에 융합되었다.[19] 식민지 시대 말기에는 퀘벡 침공에 실패한 후 대륙군에 입대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 독립 전쟁 주요 전장에서 활약했다. 전쟁 후 뉴욕주는 샴플레인 호수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캐나다와 노바스코샤 난민 구역을 형성했다.[23]

184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퀘벡 이주를 통해 거의 100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 특히 뉴잉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로 이주했다. 이들은 퀘벡의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750년경 북아메리카의 누벨프랑스 지도


루이지애나 크리올은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척민들의 후손으로, 프랑스계와 스페인계는 물론 혼혈 유산을 가진 사람들도 포함한다.[14] 이들은 공통된 유럽 유산과 프랑스어, 가톨릭교 신앙 등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한다. 루이지애나의 카주인들은 아카디아에 정착했던 조상들의 후손으로, 1755년 아카디아인 추방 이후 루이지애나로 이주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1812년 전쟁 동안 프랑스계 루이지애나 주민들은 미국 편에서 뉴올리언스 전투에 참가했으며, 장 라피트 등은 앤드류 잭슨 장군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5]

19세기에는 퀘벡과 뉴브런즈윅에서 온 프랑스계 사람들이 뉴잉글랜드뉴욕주의 제조업 도시로 이주하여 "리틀 캐나다"를 형성했다.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메인 주 인구의 30%를 차지했다.[27]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선언을 기념하여 프랑스 국민이 기증한 것이다.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로마 가톨릭 유산을 가진 경우가 많으며, 프랑스 혁명 이전에 북미로 건너왔기 때문에 프랑스 삼색기보다 플뢰르 드 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2. 1. 초기 정착과 식민지 시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미국 독립 전쟁 이전부터 미국 중서부, 루이지애나주, 뉴잉글랜드 북부 등에 정착했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의 많은 도시와 지명은 프랑스식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데모인, 세인트루이스, 루이빌, 디트로이트 등이 대표적이다.[10] 총 23개의 미국 본토 주가 프랑스 개척자나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프랑스 왕국 출신 정착민, 정치 망명자, 위그노를 포함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 왈롱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시)에 정착하기도 했다.[11][12]

17세기와 18세기 초, 루이 14세가 1685년에 발표한 퐁텐블로 칙령으로 종교 박해를 피해 칼뱅주의 신자였던 위그노 수천 명이 유입되었다.[18] 이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와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했으며, 스태튼 아일랜드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에 포함되기도 했다.[12]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 체결로 네덜란드는 이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했고, 영국은 이 식민지를 뉴욕으로, 수도를 뉴욕시로 개명했다.

위그노들은 한 세기 동안 독특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정체성을 유지하며 미국 사회와 거리를 두었지만, 미국 독립 전쟁 무렵에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혼인하여 장로교 공동체에 융합되었다.[19] 1700년 당시 이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백인 인구의 13%, 뉴욕 주 백인 인구의 5%를 차지했다.[18] 가장 많은 수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정착했으며, 1790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백인 인구의 4%를 차지했다.[20][21] 국제적인 위그노 공동체의 도움으로 버지니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으며,[22] 북쪽에서는 보스턴폴 리비어가 유명한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대 말기, 1775-1776년 퀘벡 침공이 실패한 후, 대륙군에 입대한 수백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 독립 전쟁 주요 전장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주는 샴플레인 호수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캐나다와 노바스코샤 난민 구역을 형성했다. 1780년대 초 식민지 개척 노력부터 퀘벡의 "대량 이탈" 시대까지, 뉴욕주 북동부 클린턴 군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존재는 피할 수 없었다.[23]

1840년대~1930년대에는 퀘벡 이주를 통해 거의 100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주로 뉴잉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에 정착했다. 이들은 퀘벡의 경제적 침체를 피하고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를 찾았다. 역사적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출산율 중 하나를 기록했는데, 이는 프랑스로부터의 낮은 이민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를 설명한다.

1754년 아카디아 세력도


아카디아인 추방


1755년 아카디아인 추방 당시, 많은 아카디아인들이 영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여 13개 식민지로 추방되었다. 이후 약 4천 명의 프랑스계 사람들이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가 매각된 이후 프랑스계 이주민들은 남부를 포함하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구 프랑스령 생도맹그에서도 미국으로 이민이 유입되었다. 1804년 아이티 공화국 독립의 여파로 많은 백인과 소수의 혼혈들이 루이지애나주로 이주해왔다.

1827년부터 1870년까지 미국으로의 프랑스 이민[65]
연도프랑스 이민자 수연도프랑스 이민자 수
18271,28018495,841
18282,84318509,389
1829582185120,126
18301,17418526,763
18312,038185310,170
18325,361185413,317
18334,68218556,044
18342,98918567,246
18352,69618572,397
18364,44318583,155
18375,07418592,579
18383,67518603,961
18397,19818612,326
18407,41918623,142
18415,00618631,838
18424,50418643,128
18433,34618656,855
18443,15518666,855
18453,15518675,237
184610,58318681,989
184720,04018694,531
18487,74318705,120
총계242,231



1755년 아카디아에서 13개의 영국 식민지로의 아카디아인 추방[68]
아카디아인 수비율
매사추세츠주2,00026.75%
버지니아주1,50020.06%
캐롤라이나1,02713.74%
메릴랜드주1,00013.38%
코네티컷주7009.4%
펜실베이니아주5006.7%
조지아주4506.0%
뉴욕주3004.0%
총계7,477100%



1763년부터 1790년까지 캐나다, 뉴잉글랜드 및 프랑스에서 루이지애나로의 아카디아인 이민
[68]
출신지아카디아인 수비율연도
캐나다4,00056.34%1763–1790
뉴잉글랜드1,50021.13%1765–1770
프랑스1,60022.54%1785
총계7,100100%style="text-align:center;"|


2. 1. 1. 누벨프랑스



루이지애나 크리올인은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척민들의 후손, 특히 프랑스계와 스페인계 후손들을 가리키지만 혼혈 유산을 가진 사람들(유색 크리올인 참조)도 포함한다.[14] 이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공통된 유럽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어의 전통적인 사용이나 가톨릭교의 지속적인 실천과 같은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서로 관련이 있다. 혼혈 크리올인들은 아프리카계와 아메리카 원주민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14] 이들은 집단으로서 빠르게 교육, 기술(뉴올리언스의 많은 사람들이 장인으로 일했다), 사업 및 재산을 얻기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식민지 시대 프랑스어(일부는 루이지애나 크리올어도 사용)를 사용했으며, 다른 조상과 루이지애나 문화에 의해 수정된 많은 프랑스 사회 관습을 유지했다. 자유 유색인들은 자신의 계급과 사회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결혼했다.

루이지애나의 카주인들은 독특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아카디아인의 후손을 "크리올"로 분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루이지애나 크리올인과는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카주인들의 조상은 현재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메인주의 일부인 아카디아에 17세기와 18세기 초에 정착했다. 1755년, 영국 당국은 보세주르 요새와 이 지역의 다른 여러 프랑스 요새를 점령한 후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대다수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영국은 그들을 남쪽의 13개 식민지로 강제 추방했는데, 이는 아카디아인 추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세대에 걸쳐 약 4천 명의 아카디아인들이 루이지애나로 긴 여정을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카주인"이라는 이름은 "아카디아인"이라는 단어의 변형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카주인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많은 식민지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1803년 나폴레옹에 의해 매각되었을 때, 현재 미국의 15개 주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했으며, 프랑스와 캐나다 식민지 주민들이 흩어져 살았지만, 가장 남쪽 부분에 많이 살았다.

1812년 전쟁 동안 프랑스계 루이지애나 주민들은 미국의 편에서 뉴올리언스 전투(1814년 12월 23일~1815년 1월 8일)에 참가했다. 장 라피트와 그의 바라타리아인들은 나중에 뉴올리언스 방어에 대한 공헌으로 미국 장군 앤드류 잭슨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5]

오늘날 루이지애나에서는 카주인 지역 인구의 15% 이상이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보고했다.[16]

루이지애나로 이주한 또 다른 중요한 이민자 집단은 생도밍그(오늘날의 아이티)였다. 이 시기에 많은 생도밍그인들이 도망쳤고, 디아스포라의 절반이 결국 뉴올리언스에 정착했다.[17]

미시시피주빌럭시앨라배마주모빌은 캐나다인 피에르 르무안 디베르빌에 의해 건설된 이후로 프랑스계 미국인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루이지애나의 후마족은 여전히 300년 전에 배운 것과 같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2. 1. 2. 루이지애나

루이지애나 크리올인은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척민들의 후손, 특히 프랑스계와 스페인계 후손들을 가리키지만 혼혈 유산을 가진 사람들(유색 크리올인 참조)도 포함한다.[14] 이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공통된 유럽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어 사용이나 가톨릭교 신앙과 같은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한다. 대부분 서로 관련이 있으며, 혼혈 크리올인들은 아프리카계와 아메리카 원주민계 혈통을 가진 경우도 있다.[14] 이들은 집단으로서 빠르게 교육, 기술(뉴올리언스의 많은 사람들이 장인으로 일했다), 사업 및 재산을 얻기 시작했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식민지 시대 프랑스어(일부는 루이지애나 크리올어도 사용)를 사용하고, 다른 조상과 루이지애나 문화에 의해 수정된 많은 프랑스 사회 관습을 유지했다. 자유 유색인들은 자신의 계급과 사회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결혼했다.

루이지애나의 카주인들은 독특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아카디아인의 후손을 "크리올"로 분류했지만, 일반적으로 루이지애나 크리올인과는 구별된다. 카주인들의 조상은 현재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메인주의 일부인 아카디아에 17세기와 18세기 초에 정착했다. 1755년, 영국 당국은 보세주르 요새와 이 지역의 다른 프랑스 요새들을 점령한 후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대다수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영국은 아카디아인 추방을 통해 그들을 남쪽의 13개 식민지로 강제 추방했다. 이후 약 4천 명의 아카디아인들이 루이지애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며, "카주인"이라는 이름은 "아카디아인"이라는 단어의 변형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카주인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식민지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1803년 나폴레옹에 의해 매각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현재 미국의 15개 주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했으며, 프랑스와 캐나다 식민지 주민들이 흩어져 살았지만, 가장 남쪽 부분에 많이 살았다.

1812년 전쟁 동안 프랑스계 루이지애나 주민들은 미국의 편에서 뉴올리언스 전투(1814년 12월 23일~1815년 1월 8일)에 참가했다. 장 라피트와 그의 바라타리아인들은 뉴올리언스 방어에 공헌하여 미국 장군 앤드류 잭슨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5]

오늘날 루이지애나에서는 카주인 지역 인구의 15% 이상이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보고했다.[16]

루이지애나로 이주한 또 다른 중요한 이민자 집단은 생도밍그(오늘날의 아이티)였다. 이 시기에 많은 생도밍그인들이 도망쳤고, 이주민의 절반이 결국 뉴올리언스에 정착했다.[17]

미시시피주빌럭시앨라배마주모빌은 캐나다인 피에르 르무안 디베르빌에 의해 건설된 이후로 프랑스계 미국인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루이지애나의 후마족은 여전히 300년 전에 배운 것과 같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2. 2. 19세기 퀘벡 이주와 뉴잉글랜드 정착

19세기, 많은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벡과 뉴브런즈윅에서 뉴잉글랜드뉴욕주의 섬유 산업 중심지인 제조업 도시들로 일자리를 찾아 왔다. 그들은 "리틀 캐나다"로 알려진 지역 사회에 모여 살았다.[27] 같은 시기에 퀘벡 출신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애디론댁 산맥과 그 산기슭의 제재소와 벌목 캠프에서 다수의 노동자를 차지했다. 그들은 그 지역 인구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메인 주 인구의 30%를 차지했다.[27]

공장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핵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들은 뉴잉글랜드를 자신이 캐나다 농가의 기대와는 다른 경제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의 장소로 여겼다. 20세기 초, 일부는 미국으로의 일시적인 이주를 통과 의례이자 자기 발견과 자립의 시간으로 보았다. 대부분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고, 저렴한 철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때때로 퀘벡을 방문했다. 이 여성들이 결혼했을 때, 그들은 캐나다 여성들보다 더 적은 수의 아이를 더 긴 간격으로 낳았다. 어떤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구전 자료에 따르면 자립과 경제적 독립은 결혼과 모성보다 일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다. 이 여성들은 '카나디엔느'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성 역할에 순응했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 더 큰 독립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역할을 재정의하기도 했다.[28][29]

1840년대~1930년대의 퀘벡 이주는 프랑코-아메리카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기간 동안 거의 100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주로 뉴잉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에 정착했다. 그들은 퀘벡의 경제적 침체를 피하고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를 찾았다. 역사적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출산율 중 하나를 기록했는데, 이는 프랑스로부터의 낮은 이민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를 설명한다.

1827년부터 1870년까지 미국으로의 프랑스 이민[65]
연도프랑스 이민자 수연도프랑스 이민자 수
18271,28018495,841
18282,84318509,389
1829582185120,126
18301,17418526,763
18312,038185310,170
18325,361185413,317
18334,68218556,044
18342,98918567,246
18352,69618572,397
18364,44318583,155
18375,07418592,579
18383,67518603,961
18397,19818612,326
18407,41918623,142
18415,00618631,838
18424,50418643,128
18433,34618656,855
18443,15518666,855
18453,15518675,237
184610,58318681,989
184720,04018694,531
18487,74318705,120
총계242,231


2. 3. 아카디아인 추방

1755년 보세주르 요새에서 영국군에 붙잡힌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에 해당하는 아카디아 지역의 프랑스계 이주민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추방당해야 했다.[68] 많은 이들이 충성을 거부하여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13개 식민지로 보내졌는데, 이를 아카디아인 추방이라 부른다.[68]

아카디아인 수비율
매사추세츠주2,00026.75%
버지니아주1,50020.06%
캐롤라이나1,02713.74%
메릴랜드주1,00013.38%
코네티컷주7009.4%
펜실베이니아주5006.7%
조지아주4506.0%
뉴욕주3004.0%
총계7,477100%



이후 한 세대가 지나 약 4천 명의 프랑스계 사람들이 루이지애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이들은 루이지애나 아케이디아나 지역에 프랑스 식민지 시대 문화를 남겼으며, '케이준'이라는 이름은 '아카디안'이 변형된 것이다.

3. 주요 정착 지역

프랑스계 미국인은 미국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오늘날 뉴잉글랜드, 뉴욕주 북부, 중서부,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가장 많이 거주한다. 프랑스계 미국인은 종종 프랑스계 캐나다인, 카주인, 루이지애나 크리올 혈통으로 더 구체적으로 구분된다.[13]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이미 미국 중서부, 루이지애나주, 뉴잉글랜드 북부 등에 정착한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데모인(아이오와주), 세인트루이스(미주리주), 루이빌(켄터키주), 디트로이트(미시간주) 등은 이들이 지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23개의 미국 본토 주가 프랑스 개척자나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의해 일부 식민지화되었다.[10]

1840년대~1930년대에는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퀘벡의 경제적 침체를 피해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를 찾아 이주했으며, 주로 뉴잉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에 정착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출산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프랑스로부터의 낮은 이민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를 설명하는 요인이다.

3. 1. 뉴잉글랜드

19세기, 많은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벡과 뉴브런즈윅에서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의 섬유 산업 중심지인 제조업 도시들로 일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리틀 캐나다"로 알려진 지역 사회에 모여 살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퀘벡 출신 프랑코폰들은 애디론댁 산맥과 그 산기슭의 제재소와 벌목 캠프에서 다수의 노동자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 인구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메인 주 인구의 30%를 차지했습니다.[27]

매사추세츠주 홀리오크의 프랑스계 사회 구성원들이 1902년 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공장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핵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들은 뉴잉글랜드를 캐나다 농가의 기대와는 다른 경제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의 장소로 여겼습니다. 20세기 초, 일부는 미국으로의 일시적인 이주를 통과 의례이자 자기 발견과 자립의 시간으로 보았습니다. 대부분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고, 저렴한 철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때때로 퀘벡을 방문했습니다. 이 여성들이 결혼했을 때, 캐나다 여성들보다 더 적은 수의 아이를 더 긴 간격으로 낳았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구전 자료에 따르면 자립과 경제적 독립은 결혼과 모성보다 일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 여성들은 '카나디엔느'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성 역할에 순응했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 더 큰 독립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역할을 재정의하기도 했습니다.[28][29]

여성들은 또한 수녀회 회원으로서 프랑스계 미국인의 경험을 형성했습니다. 메인 주 루이스턴의 첫 번째 병원은 1889년 몬트리올 자선 수녀회인 '그레이 수녀회'가 루르드 성모 영보 수용소를 열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병원은 루이스턴의 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 방직 노동자들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레이 수녀회의 사명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레이 수녀회는 빈약한 재정 자원, 언어 장벽, 기존 의료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관 설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30][31]

북동부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회는 물려받은 문화적 규범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제도 내에서 일어났지만, 아일랜드 성직자들에 대한 성공이 거의 없는 투쟁을 수반했습니다. Raymond Potvin에 따르면, 주로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성직자 계층은 프랑스어 교구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느렸습니다. 일부 주교들은 동화와 영어 전용 교구 학교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가 되자 프랑코폰 학생들을 위한 여러 교구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세기 후반에 점차 문을 닫았고 상당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교구에 성직자를 배치할 수 있는 사제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32] 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Le Messager''와 ''라 쥐스티스''와 같은 프랑스계 미국인 신문은 신앙과 언어를 통해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인 '서바이번스(survivance)' 이념의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33] 1913년 뉴욕시, 폴리버(매사추세츠주), 맨체스터(뉴햄프셔주)의 프랑스인과 프랑스계 캐나다인 인구는 미국에서 가장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20개의 가장 큰 프랑스계 미국인 인구 중 뉴욕과 뉴잉글랜드 외부에 있는 도시는 4개 도시에 불과했으며, 뉴올리언스는 전국 18위를 차지했습니다.[34] 이 때문에 보스턴에 있는 Société Historique Franco-américaine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큰 프랑스계 가톨릭 문화 및 상호 이익 사회인 우선 생장-바티스트 다메리크(우선석)를 포함한 여러 프랑스 기관이 뉴잉글랜드에 설립되었습니다.[35] 1920년대에 퀘벡에서의 이민은 감소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섬유 산업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계 사회는 상향 이동과 동화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많은 가톨릭 단체가 영어로 전환하고 교구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 동화 패턴이 증가했습니다. 일부 교구 학교는 1970년대에 문을 닫았습니다.[27][36] 최근 수십 년 동안 자기 식별은 프랑스어에서 멀어졌습니다.

프랑스계 미국인 문화는 21세기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잘 확립된 족보 학회와 공공 역사 장소는 여전히 프랑스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때때로 퀘벡과 북동부의 주 정부의 상업적 및 문화적 이익에 의해 지원됩니다.[37] 새로운 그룹과 행사가 이 노력에 기여했습니다. 일부 관찰자들은 최근의 발전과 1970년대 젊은이들에 의한 "프랑코" 문화의 도용과 현대화를 비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르네상스" 또는 "부흥"이 진행 중입니다.[38][39]

Timothy Beaulieu가 설립한 뉴햄프셔 푸틴 축제는 상징적인 퀘벡 요리를 사용하여 문화에 대한 관심을 넓히고 있습니다.[40] 프랑스계 캐나다인 레거시 팟캐스트는 국경 양쪽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경험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을 제공합니다. 퀘벡 정부 사무소와 지역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팟캐스트 팀은 뉴잉글랜드 주요 도시의 프랑스계 미국인 생활에 전념하는 지오투어를 설립했습니다.[41] 최근에는 개척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Camille-Lessard Bissonnette에 대한 기념 행위가 확대되었습니다.[42] Abby Paige는 그녀의 부분에 대해 지역 사회의 역사와 복잡한 유산을 무대에 올렸습니다.[43] 루이지애나, 중서부 및 북동부의 문화와 그 표현은 하버드 대학교 강좌의 초점이 되었습니다.[44] 프랑코포니 월(3월)과 성 요한 침례자의 날(6월 24일)은 축하와 가시성 증진의 기회를 제공합니다.[45] 동시에, 지역 사회의 일부 구성원은 인종[46][47]과 계급[48]에 대한 논의에서 프랑스계 미국인의 위치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메인 주 웨스트브룩에서 자란 프랑스계 캐나다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음악가 루디 발레(1901~1986)[49]와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자란 반문화 작가 잭 케루악(1922~1969)은 프랑스 뿌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주목할 만한 미국 대중 문화 인물입니다. 케루악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이민자 두 명의 자녀였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썼습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프랑스계 미국인 정치 인물로는 미국 상원의원 켈리 아요트((R), 뉴햄프셔주), 메인 주 주지사 폴 르페이지, 그리고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나 자란 대통령 고문 존 파브로가 있습니다.

3. 2. 루이지애나



루이지애나 크리올인은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척민들의 후손, 특히 프랑스계와 스페인계 후손들을 가리키지만 혼혈 유산을 가진 사람들 (유색 크리올인 참조)도 포함한다. 인종에 관계없이 공통된 유럽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어의 전통적인 사용이나 가톨릭교의 지속적인 실천과 같은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서로 관련이 있다. 혼혈 크리올인들은 아프리카계와 아메리카 원주민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14] 혼혈 크리올인들은 집단으로서 빠르게 교육, 기술(뉴올리언스의 많은 사람들이 장인으로 일했다), 사업 및 재산을 얻기 시작했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식민지 시대 프랑스어(일부는 루이지애나 크리올어도 사용)를 사용했으며, 다른 조상과 루이지애나 문화에 의해 수정된 많은 프랑스 사회 관습을 유지했다. 자유 유색인들은 자신의 계급과 사회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결혼했다.

루이지애나의 카주인들은 독특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아카디아인의 후손을 "크리올"로 분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루이지애나 크리올인과는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상은 현재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메인주의 일부인 아카디아에 17세기와 18세기 초에 정착했다. 1755년, 영국 당국은 보세주르 요새와 이 지역의 다른 여러 프랑스 요새를 점령한 후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대다수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영국은 그들을 남쪽의 13개 식민지로 강제 추방했는데, 이는 아카디아인 추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세대에 걸쳐 약 4천 명의 아카디아인들이 루이지애나로 긴 여정을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카주인"이라는 이름은 "아카디아인"이라는 단어의 변형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카주인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많은 식민지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1803년 나폴레옹에 의해 매각되었을 때, 현재 미국의 15개 주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했으며, 프랑스와 캐나다 식민지 주민들이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은 가장 남쪽 부분에 가장 많이 살았다.

1812년 전쟁 동안 프랑스계 루이지애나 주민들은 미국의 편에서 뉴올리언스 전투(1814년 12월 23일~1815년 1월 8일)에 참가했다. 장 라피트와 그의 바라타리아인들은 나중에 뉴올리언스 방어에 대한 공헌으로 미국 장군 앤드류 잭슨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5]

오늘날 루이지애나에서는 카주인 지역 인구의 15% 이상이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 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보고했다.[16]

루이지애나로 이주한 또 다른 중요한 이민자 집단은 생도밍그(오늘날의 아이티)였다. 이 시기에 많은 생도밍그인들이 도망쳤고, 디아스포라의 절반이 결국 뉴올리언스에 정착했다.[17]

미시시피주빌럭시앨라배마주모빌은 캐나다인 피에르 르무안 디베르빌에 의해 건설된 이후로 프랑스계 미국인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루이지애나의 후마족은 여전히 300년 전에 배운 것과 같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3. 3. 중서부

미국의 건국 이전에 이미 미국 중서부에 정착한 프랑코-아메리카인들이 일부 있었다. 이 지역의 많은 도시와 지리적 특징들은 최초의 프랑코-아메리카인 주민들이 지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23개의 미국 본토 주가 프랑스 개척자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 의해 일부 식민지화되었다. 여기에는 데모인(아이오와주), 세인트루이스(미주리주), 루이빌(켄터키주), 디트로이트(미시간주) 등의 정착지가 포함된다.[10]

17세기 초부터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쿠뢰르 드 부아(coureur de bois)와 장 니콜레(Jean Nicolet), 로베르 드 라살(Robert de LaSalle), 자크 마르케트(Jacques Marquette), 니콜라 페로(Nicholas Perrot), 피에르 르 무아네 디베르빌(Pierre Le Moyne d'Iberville), 앙투안 드 라 모트 카디야크(Antoine de la Mothe Cadillac), 피에르 뒤게 드 부아브리앙(Pierre Dugué de Boisbriant), 뤼시앵 갈티에(Lucien Galtier), 피에르 라클레드(Pierre Laclède), 르네 오귀스트 슈토(René Auguste Chouteau), 쥘리앙 뒤뷔크(Julien Dubuque), 피에르 드 라 베랑드리(Pierre Gaultier de Varennes, sieur de La Vérendrye), 피에르 파랑(Pierre Parrant) 등과 같은 탐험가들과 함께 이 지역을 탐험하고 여행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프레리 뒤 쉬앵(Prairie du Chien, Wisconsin), 그린 베이(Green Bay, Wisconsin, La Baye, Wisconsin), 카호키아(Cahokia, Illinois), 카스카스키아(Kaskaskia, Illinois), 디트로이트(Detroit, Michigan), 소 센트 메리(Sault Sainte Marie, Michigan), 생티냐스(Saint Ignace, Michigan), 뱅생(Vincennes, Indiana), 세인트폴(St. Paul, Minnesota), 세인트루이스(St. Louis, Missouri), 생트 제네비에브(Sainte Genevieve, Missouri)를 포함한 수많은 마을들을 수로를 따라 건설했다. 또한 포트 드 샤르트르(Fort de Chartres), 포트 크레브커(Fort Crevecoeur), 포트 생 루이(Fort Saint Louis (Illinois)), 포트 우이아테논(Fort Ouiatenon), 포트 미아미 (미시간주)(Fort Miami (Michigan)), 포트 미아미 (인디애나주)(Fort Miami (Indiana)), 포트 생 조셉(Fort St. Joseph (Niles)), 포트 라 베이(Fort La Baye), 포트 드 부아드(Fort de Buade), 포트 생 앙투안(Fort Saint Antoine), 포트 트롱페알뢰(Fort Trempealeau), 포트 보아르누아(Fort Beauharnois), 포트 오를레앙(Fort Orleans), 포트 생 샤를(Fort St. Charles), 포트 카미니스티키아(Fort Kaministiquia), 포트 미실리마키낙(Fort Michilimackinac), 포트 루이(Fort Rouillé), 포트 나이아가라(Fort Niagara), 포트 르 뵈프(Fort Le Boeuf), 포트 베낭고(Fort Venango), 포트 뒤케인(Fort Duquesne)과 같은 일련의 요새들을 건설했다. 이 요새들은 군인들과 모피 사냥꾼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그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는 그레이트 레이크스를 거쳐 몬트리올까지 이어져 있었다.[24] ''페이 드 릴리노이''(Pays des Illinois)에는 상당한 규모의 농업 정착촌이 세워졌다.[25]

이 지역은 1763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 (1763))에 따라 프랑스 왕국(Kingdom of France)에서 영국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에 넘어갔다. 그 후 원주민들에 의한 3년간의 전쟁, 즉 폰티악의 전쟁(Pontiac's War)이 발생했다. 1774년에는 퀘벡법(Quebec Act)에 따라 퀘벡 주(Province of Quebec)의 일부가 되었고, 미국 독립 전쟁 중에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다.[26]

3. 4.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초기에는 2만 명이 넘는 프랑스 이민자들이 캘리포니아주에 도착했다.[50] 1850년대 중반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서부 해안에서 프랑스계 인구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3만 명이 넘는 프랑스계 사람들이 거주하여 독일계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 많았다.[51]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인 거리가 조성되었고, 부댕 베이커리(Boudin Bakery)와 프랑스 병원과 같은 중요한 사업체와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19세기 후반 샌프란시스코로 프랑스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프랑스계 기업가들은 도시의 요리, 패션, 금융 분야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53]

프랑스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은 노스베이 지역에도 정착하기 시작하여 와인 컨트리(Wine Country)의 개발과 현대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54]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보자르 양식의 프랑스 건축이 도시 재건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시청, 리전 오브 아너 미술관 및 시내의 뉴스 가판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51]

실리콘밸리의 부상과 닷컴 버블 이후 대부분의 프랑스 다국적 기업들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미국 본사 또는 자회사를 설립했다.[55]

4. 문화

프랑스계 미국인은 미국 전역에 분포하지만, 대부분은 북부 뉴욕주, 루이지애나주뉴잉글랜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루이지애나주 아케이디아나에서는 15%가 가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어는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에 이어 미국에서 사용되는 주요 언어 중 하나이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현재 15개 주에 걸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가 매각된 이후 프랑스계 이주민들은 남부를 포함하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81]

많은 프랑스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프랑스계 캐나다인, 케이준, 크레올로 인식한다. 이들의 북미 활동은 184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친 퀘벡 이주로 본격화되었다. 약 100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미네소타주, 위스콘신주, 미시간주(오대호 연안 주) 등으로 이주했다. 당시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출산율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기 때문에, 본국 프랑스에서의 이민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구는 많았다. 이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온타리오주매니토바주 등 캐나다 내에서도 흩어져 살았다. 남성 노동자들은 주로 목재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오대호 주변의 광업에 종사했다.

1804년 구 프랑스령 생-도맹그가 독립전쟁을 거쳐 아이티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많은 백인과 소수의 혼혈들이 루이지애나주로 이주해왔다. 이들은 크레올로서 미국에 동화되었다.

루이지애나의 케이준은 특별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현재의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에 해당하는 아카디아에 이주한 그들의 조상들은 1755년 보세주르 요새에서 영국군에 붙잡혔다. 영국 왕에게 충성을 거부한 많은 이들은 재산 몰수와 함께 13개 식민지로 추방되었는데, 이를 아카디아인 추방이라 한다.[82] 이로부터 한 세대 후, 약 4천 명의 프랑스계 사람들이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루이지애나주 아케이디아나에는 지금도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문화가 남아 있다. '케이준'은 '아카디안'이 변형된 말이다.

대부분의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북미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마크는 현재의 프랑스 삼색기가 아니라 군주제 시대의 플뢰르 드 리이다.

4. 1. 언어

19세기, 많은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벡과 뉴브런즈윅에서 뉴잉글랜드뉴욕주의 제조업 도시들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했다. 그들은 "리틀 캐나다"로 알려진 지역 사회에 모여 살았으며,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메인주 인구의 30%를 차지했다.[27]

공장들은 온 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들은 뉴잉글랜드를 경제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의 장소로 여겼다. 20세기 초, 일부는 미국으로의 일시적인 이주를 통과 의례이자 자립의 시간으로 보았다. 대부분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고, 저렴한 철도를 이용하여 때때로 퀘벡을 방문했다. 이 여성들은 결혼했을 때, 캐나다 여성들보다 더 적은 수의 아이를 더 긴 간격으로 낳았다. 어떤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구전 자료에 따르면 자립과 경제적 독립은 결혼과 모성보다 일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다. 이 여성들은 '카나디엔느'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더 큰 독립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재정의하기도 했다.[28][29]

북동부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회는 문화적 규범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레이먼드 포트빈(Raymond Potvin)에 따르면, 주로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성직자 계층은 프랑스어 교구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느렸다. 20세기가 되자 프랑코폰 학생들을 위한 여러 교구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세기 후반에 점차 문을 닫았고 상당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교회를 떠났다. 동시에, 이러한 교구에 성직자를 배치할 수 있는 사제의 수가 줄어들었다.[32] ''Le Messager''와 ''라 쥐스티스''와 같은 프랑스계 미국인 신문은 신앙과 언어를 통해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인 '서바이번스(survivance)' 이념의 기둥 역할을 했다.[33] 1913년 뉴욕시, 폴리버(매사추세츠주), 맨체스터(뉴햄프셔주)의 프랑스인과 프랑스계 캐나다인 인구는 미국에서 가장 많았다.[34]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섬유 산업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계 사회는 상향 이동과 동화의 시기를 경험했다. 많은 가톨릭 단체가 영어로 전환하고 교구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 동화 패턴이 증가했다. 일부 교구 학교는 1970년대에 문을 닫았다.[27][36] 최근 수십 년 동안 자기 식별은 프랑스어에서 멀어졌다.

미국 국립 교육청에 따르면, 프랑스어는 스페인어 다음으로 미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이 가르치는 외국어이며,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의 비율은 12.3%이다.[64]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어는 영어와 스페인어 다음으로 미국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며, 2,097,206명의 화자가 있다.[81]

17세기와 18세기에 프랑스 이민자들이 유입된 결과, 프랑스어는 한때 중서부의 수십 개 마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860년 이후 퀘벡 출신 이민자들은 뉴잉글랜드에 프랑스어를 전파했다. 프랑스어 신문은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많은 미국 도시, 특히 뉴잉글랜드의 특정 도시에서 발행되었다. 1920년 이전 프랑스계 캐나다인 동네는 때때로 "리틀 캐나다"로 알려지기도 했다.[82]

1960년 이후 "리틀 캐나다"들은 사라져 갔다.[83]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어 기관이 거의 없었다. 프랑스어 신문도 있었지만, 1935년에는 총 5만 명의 구독자에 불과했다.[84] 2차 세계 대전 세대는 자녀들에게 이중 언어 교육을 피하고 영어를 사용하도록 고집했다.[85] 1976년까지 프랑코-아메리칸 10명 중 9명은 일반적으로 영어를 사용했으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젊은 프랑코-아메리칸 세대는 자신의 유산을 거부했다"는 데 동의했다.[86]

미국의 프랑스어 사용자 밀도

4. 2. 종교

17세기와 18세기 초,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1685년에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면서 종교 박해를 피해 칼뱅주의 신자였던 위그노 몇 천 명이 유입되었다.[18]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와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했으며, 스태튼 아일랜드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에 포함되었다.[12] 1674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웨스트민스터 조약 체결과 함께 네덜란드는 이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했고, 영국은 이 식민지를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그 수도를 뉴욕시로 개명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 정착민들은 독특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정체성을 키워 미국 사회와 거리를 유지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 무렵에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혼인하여 더 큰 장로교 공동체에 융합되었다.[19] 1700년 당시 그들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백인 인구의 13%, 뉴욕주 백인 인구의 5%를 차지했다.[18] 가장 많은 수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정착했으며, 1790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백인 인구의 4%를 차지했다.[20][21] 잘 조직된 국제적인 위그노 공동체의 도움으로 버지니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22] 북쪽에서는 폴 리비어가 유명한 인물이었다.

19세기, 많은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벡뉴브런즈윅에서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의, 특히 섬유 산업 중심지인 제조업 도시들로 일자리를 찾아 왔다. 그들은 "리틀 캐나다"로 알려진 지역 사회에 모여 살았다. 같은 시기에 퀘벡 출신 프랑코폰들은 애디론댁 산맥과 그 산기슭의 제재소와 벌목 캠프에서 다수의 노동자를 차지했다.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메인주 인구의 30%를 차지했다.[27]

공장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핵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들은 뉴잉글랜드를 자신이 캐나다 농가의 기대와는 다른 경제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의 장소로 여겼다. 20세기 초, 일부는 미국으로의 일시적인 이주를 통과 의례이자 자기 발견과 자립의 시간으로 보았다. 이 여성들은 '카나디엔느'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성 역할에 순응했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 더 큰 독립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역할을 재정의하기도 했다.[28][29]

여성들은 또한 수녀회 회원으로서 프랑스계 미국인의 경험을 형성했다. 메인 주 루이스턴의 첫 번째 병원은 1889년 몬트리올 자선 수녀회인 '그레이 수녀회'가 루르드 성모 영보 수용소를 열면서 현실이 되었다. 이 병원은 루이스턴의 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 방직 노동자들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레이 수녀회의 사명의 중심이었다.[30][31]

북동부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회는 물려받은 문화적 규범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제도 내에서 일어났지만, 아일랜드 성직자들에 대한 성공이 거의 없는 투쟁을 수반했다. Raymond Potvin에 따르면, 주로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성직자 계층은 프랑스어 교구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느렸다. 20세기가 되자 프랑코폰 학생들을 위한 여러 교구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세기 후반에 점차 문을 닫았고 상당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교회를 떠났다. 동시에, 이러한 교구에 성직자를 배치할 수 있는 사제의 수가 줄어들었다.[32] 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Le Messager''와 ''라 쥐스티스''와 같은 프랑스계 미국인 신문은 신앙과 언어를 통해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인 '서바이번스(survivance)' 이념의 기둥 역할을 했다.[33]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섬유 산업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계 사회는 상향 이동과 동화의 시기를 경험했다. 많은 가톨릭 단체가 영어로 전환하고 교구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 동화 패턴이 증가했다. 일부 교구 학교는 1970년대에 문을 닫았다.[27][36]

크리올 소녀들, 플라케민느 패리시, 루이지애나주, 1935


대부분의 프랑코-아메리칸들은 로마 가톨릭 유산을 가지고 있다(대부분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케이준을 포함). 프로테스탄트들은 두 차례의 더 작은 물결을 타고 도착했는데, 가장 초기 도착자는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에서 도망친 위그노들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보스턴, 찰스턴, 뉴욕,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69] 위그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식민지 시대의 반 가톨릭 정서로 인해, 퐁텐블로 칙령 시대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펜실베이니아 및 캐롤라이나 주로 이주했다.[70] 19세기에는 스위스 출신의 다른 사람들이 도착했다.[71]

특히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뉴잉글랜드의 교회를 지배했던 영어를 사용하는 아일랜드 가톨릭과 그들의 언어가 교구 학교에서 가르쳐지기를 원했던 프랑스계 캐나다 이민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었다. 아일랜드계는 어섬션 대학교(프랑스인이 통제)와 뉴햄프셔 주의 한 독일인이 통제하는 학교를 제외한 뉴잉글랜드의 모든 가톨릭 대학교를 통제했다. 1920년대의 센티넬 사건은 분기점이 되었다. 로드아일랜드주 워슨켓의 프랑코-아메리칸 가톨릭 신자들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주교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실패한 시도에서 교구 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주교에게 도전했다.[76][77] 1957년 도시 역사에 관한 논문에서 미국의 역사가 컨스턴스 그린(Constance Green)은 매사추세츠주, 특히 홀리오크에서 프랑스계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일부 분쟁은 가톨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를 바라는 양키계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주장했다.[78]

마리 로즈 페롱은 신비주의적인 성흔자였다. 그녀는 퀘벡에서 태어나 로드아일랜드주 워슨켓에서 살았다. 1925년에서 1936년 사이에 그녀는 자신의 공동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인기 있는 "희생자 영혼"이었다. 오네짐 보이어(Onésime Boyer) 신부는 그녀의 숭배를 장려했다.[79]

식민지 시대에 이주해 온 프랑스계 미국인의 신앙은 크게 가톨릭계와 프로테스탄트위그노계로 나뉜다. 누벨프랑스는 가톨릭 신자만을 이주민으로 받아들였고, 본국에서도 종교 차별을 받았던 위그노는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이들 국가의 해외 영토(13개 식민지케이프 식민지 등)로의 이주를 모색했다. 그들은 가톨릭권 국가보다 영어권 국가에 더 빨리 동화될 수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나 대법관이었던 존 제이는 위그노 출신이다.

4. 3. 프랑코-아메리칸 데이

코네티컷 주는 2008년 6월 24일을 프랑코-아메리칸의 날로 지정하여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문화와 코네티컷 주에 미친 영향을 기념했다.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주도 현재 6월 24일에 프랑코-아메리칸의 날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62]

5. 정치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1896년부터 1924년까지 공화당을 지지했다.[57] 그러나 1928년 알 스미스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민주당으로 이동하여 뉴딜 연합의 일부를 형성했다.[57] 1952년에는 많은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에서 이탈했지만, 1960년에 다시 대거 복귀했다.[57]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지역별로 차이를 보였다. 뉴잉글랜드 남부에서는 공화당이 프랑스계 미국인들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퀘벡 출신 아람 J. 포티어가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로 당선되기도 했다.[60] 반면 뉴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어 민주당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60] 1920년대 이후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민주당 지지가 강화되면서 지역적 차이는 사라졌다.[60]

5. 1. 투표 성향

워커(1962)는 1880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뉴잉글랜드 지역 30개의 프랑스계 미국인 공동체의 선거 결과와 1948년부터 1960년 선거에 대한 표본 조사 자료를 사용하여 투표 행태를 조사했다.[57] 워커에 따르면, 1896년부터 1924년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보수주의, 질서 강조, 그리고 외국 경쟁으로부터 섬유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 옹호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다.[57] 1928년, 가톨릭 신자인 알 스미스가 민주당 후보로 나서자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민주당으로 이동하여 6번의 대통령 선거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57] 그들은 뉴딜 연합의 일부를 형성했다.[57]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1940년과 1944년 선거운동의 외교 정책과 전쟁 문제 때문에 민주당을 떠난 프랑스계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57] 1952년 많은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에서 이탈했지만 1960년에 다시 대거 복귀했다.[57]

워커의 연구 결과는 추가 연구를 통해 확장되었다. 로널드 페트린은 1890년대 매사추세츠 프랑스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공화당의 부상을 탐구했는데,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집권과 맞물린 장기적인 경제 대공황과 프랑스-아일랜드 종교 논쟁이 공화당에 대한 지지 증가의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8] 마들렌 지규에르는 20세기 루이스턴의 대통령 선거 투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주당으로의 후기 이동을 확인했다.[59] 패트릭 라크로익스는 뉴잉글랜드와 뉴욕주 전역에서 당파적 참여의 다른 패턴을 발견했다.[60] 뉴잉글랜드 남부에서는 공화당이 적극적으로 "프랑코" 표를 구애하고 후보를 지명했다.[60] 공화당은 퀘벡 출신인 아람 J. 포티어를 지명했는데, 그는 로드아일랜드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여 7번의 임기를 역임했다.[60] 뉴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배제되었고 민주당으로 더 쉽게 돌아섰다.[60] 1920년대에는 지역적 차이가 사라졌다.[60] 공화당 주 정부의 국수주의적이고 반노동 정책으로 인해 점점 더 노조화되는 프랑스계 미국인 노동 계급은 지역 전체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다.[60] 엘리트 "프랑코"들은 계속해서 공화당을 선호했다.[60]

5. 2. 주요 정치인

워커(1962)는 1880년부터 1960년까지 뉴잉글랜드 지역 30개의 프랑스계 미국인 공동체의 선거 결과와 1948년부터 1960년 선거에 대한 표본 조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투표 행태를 조사했다. 워커에 따르면, 1896년부터 1924년까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보수주의, 질서 강조, 그리고 외국 경쟁으로부터 섬유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 옹호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다. 1928년, 가톨릭 신자인 알 스미스가 민주당 후보로 나서자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민주당으로 이동하여 6번의 대통령 선거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은 뉴딜 연합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1940년과 1944년 선거운동의 외교 정책과 전쟁 문제 때문에 민주당을 떠난 프랑스계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1952년 많은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에서 이탈했지만 1960년에 다시 대거 복귀했다.[57]

로널드 페트린은 1890년대 매사추세츠 프랑스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공화당의 부상을 탐구했는데,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집권과 맞물린 장기적인 경제 대공황과 프랑스계-아일랜드계 종교 논쟁이 공화당에 대한 지지 증가의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페트린은 대도시와 소도시에서 다른 정치적 행동을 인식한다.[58] 마들렌 지규에르는 20세기 루이스턴의 대통령 선거 투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주당으로의 후기 이동을 확인했다.[59] 프랑스계 미국인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연구에서 패트릭 라크로익스는 뉴잉글랜드와 뉴욕주 전역에서 당파적 참여의 다른 패턴을 발견했다. 뉴잉글랜드 남부에서는 공화당이 적극적으로 "프랑코" 표를 구애하고 후보를 지명했다. 공화당은 퀘벡 출신인 아람 J. 포티어를 지명했는데, 그는 로드아일랜드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여 7번의 임기를 역임했다. 뉴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배제되었고 민주당으로 더 쉽게 돌아섰다. 1920년대에는 지역적 차이가 사라졌다. 공화당 주 정부의 국수주의적이고 반노동 정책으로 인해 점점 더 노조화되는 프랑스계 미국인 노동 계급은 지역 전체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다. 엘리트 "프랑코"들은 계속해서 공화당을 선호했다.[60]

'''이름 가나다순. 순혈/혼혈 여부 무관.'''

정치인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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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구 통계

프랑코-아메리카인들은 미국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뉴잉글랜드, 북부 뉴욕주, 중서부, 루이지애나주,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가장 많이 거주한다. 이들은 종종 프랑스계 캐나다인, 카주인 또는 루이지애나 크리올 혈통으로 더 구체적으로 구분된다.[13]

1840년대~1930년대의 퀘벡 이주는 프랑코-아메리카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기간 동안 거의 100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주로 뉴잉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에 정착했다. 이들은 퀘벡의 경제적 침체를 피하고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를 찾았다. 역사적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출산율 중 하나를 기록했는데, 이는 프랑스로부터의 낮은 이민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를 설명한다.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른 프랑스계 미국인 분포


미국 인구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1790년에는 프랑스계 미국인이 미국 본토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 2000년에는 미국 인구의 5.3%가 프랑스계 또는 프랑스계 캐나다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기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출신 인구는 129,520명으로 추산되었다.[64]

프랑코-아메리카인은 뉴잉글랜드 6개 주와 루이지애나주를 포함한 7개 주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인구 규모로는 캘리포니아주가 가장 많은 프랑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루이지애나주가 그 뒤를 이었지만, 메인주는 가장 높은 비율(25%)을 기록했다.

6. 1. 주별 분포



미국 인구조사국은 1790년 최초의 미국 인구조사에 기록된 백인 가족 가장의 이름을 학술적으로 분류하여 프랑스계 미국인 인구 추정치를 산출했다. 1790년에 프랑스계 미국인은 미국 본토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 뉴욕, 뉴저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에서 프랑스계 소수 민족이 많았다.[63]

주 또는 준주 프랑스인(French)
#%
코네티컷0.90%
델라웨어1.62%
조지아2.27%
켄터키 & 테네시2.15%
메인1.25%
메릴랜드1.20%
매사추세츠0.80%
뉴햄프셔0.71%
뉴저지2.35%
뉴욕3.82%
노스캐롤라이나1.66%
펜실베이니아1.77%
로드아일랜드0.77%
사우스캐롤라이나3.92%
버몬트0.41%
버지니아1.47%
' 1790년 인구조사 지역(1790 Census Area)'''''1.73%
북서부 준주(Northwest Territory)''''57.14%
프랑스령 아메리카(French America)''''64.25%
스페인령 아메리카(Spanish America)''''-
''2.29%



2000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5.3%가 프랑스계 또는 프랑스계 캐나다계 혈통이다. 2013년 기준, 미국 내 프랑스 출신 인구는 129,520명으로 추산되었다.[64] 프랑코-아메리칸은 뉴잉글랜드 6개 주와 루이지애나 주를 포함한 7개 주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캘리포니아 주가 프랑코 인구가 가장 많고, 루이지애나 주가 그 뒤를 이었지만, 메인 주는 가장 높은 비율(25%)을 기록했다.

{| class="wikitable" style="float:left; margin:1em; border-collapse:collapse;"

|+ ''프랑코계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주''

|-

|



|



|}

{| class="wikitable" style="float:left; margin:1em; border-collapse:collapse;"

|+ ''프랑코계 인구가 가장 많은 주''

|-

|

인구
캘리포니아1,303,714
루이지애나1,069,558
매사추세츠947,319
미시간942,230
뉴욕834,540
텍사스673,606
플로리다618,426
일리노이485,902
오하이오464,159
코네티컷370,490
메인347,510



|

인구
위스콘신346,406
미주리345,971
워싱턴339,950
펜실베이니아338,041
뉴햄프셔337,225
미네소타321,087
뉴저지213,815
버지니아212,373
오리건209,239
로드아일랜드206,540
버몬트165,623



|}

{| style="font-size:90%; margin:0 auto;"

|-

| '''프랑스계 인구 비율이 10% 이상인 주'''
프랑스계 캐나다인 포함

| '''프랑스계 인구 비율이 4% 이상인 주'''

| '''구 누벨프랑스의 주와 인구 비율'''
루이지애나 주 제외

| '''프랑스계 인구가 많은 주'''
프랑스계 캐나다인 포함

|- valign="top"

|

비율지역
뉴햄프셔25.2%북동부
버몬트23.3%북동부
메인22.8%북동부
로드아일랜드17.2%북동부
루이지애나16.2%중남부
매사추세츠12.9%북동부
코네티컷9.9%북동부



|

비율지역
워싱턴4.6%북서부
오리건4.6%북서부
알래스카4.2%북서부



|

비율지역
미시간6.8%중북동부
몬태나5.3%중북서부
미네소타5.3%중북부
위스콘신5.0%중북부
노스다코타4.7%중북서부
와이오밍4.2%중북서부
미주리3.8%중중부
캔자스3.6%중중서부
인디애나2.7%중북동부



|

인구지역
캘리포니아927,453명남서부
매사추세츠818,388명북동부
미시간680,939명중북동부
루이지애나680,208명중남부
뉴욕628,810명북동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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